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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레이첼 슈타인 웩슬러 (공공 예술가, 도시기획자, 컨설턴트, ZK/U 펠로우)


2021년 12월 28일 대면 인터뷰 후
2022년 2월 25일 편집


인터뷰

이지영


전사 및 번역

박설희


Installation with neighborhood resident
A neighborhood resident reads from the educational installation installed exactly on the site of a former Jewish senior home in Berlin, Germany.
©R Stein Wexler


지영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슈타인
제 이름은 레이첼 슈타인 웩슬러Rachel Stein Wexler이고, 다들 슈타인Stein이라고 불러요.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미국과 독일에 이중으로 시민권이 있어요. 독일 시민권은 스무 살이 되던 해 즈음에 홀로코스트 보상 차원에서 받았지요. 저희 할머니께서는 홀로코스트 때문에 열 살 때 독일을 탈출하셔야 했어요. 2차 세계대전 때 시민권이 취소된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후손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주는 독일 내 정책이 있었죠.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랐고, 학사 과정에선 문학을 전공했어요. 몇 년 후에 거의 나라 반대쪽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도시 및 지역 계획 전공으로 석사를 했어요. 거긴 제가 살던 곳과 정말 다른 곳이었어요. 석사 과정에서는 공정 경제 개발과 창의적 공간 창출에 주력했지요. 석사를 마친 이후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더럼Durham이라는 도시에서 공공 예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공공 예술, 창의적 공간 창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감독했어요. 그러다가 이 일의 다른 면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실제로 이 일을 내가 작업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해보자는 결심이 생겨서 독일에 있는 1년 연구 프로그램에 지원했어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그게 1년 반으로 늘었지요. 저는 이곳에서 연구원으로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제 연구 결과는 공공 공간에 대한 중재나 조정에 관련된 거예요.

지영
당신의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 사이에 어떤 연결 지점이 있을까요?

슈타인
네, 저는 그 작업들이 한 연속체를 이룬다고 생각해요. 저는 공공 예술 행정가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제 작업을 관찰했죠. 무엇이든지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예술적 작업이 될 수 있어요. 그 경험을 통해 행정적인 과정이나 어려움, 위험 요인, 관계 형성, 그리고 서로 다른 이해 당사자들을 관리하는 방법 등을 알 수 있었고, 이는 제가 공공 예술 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행정가로서 겪었던 경험은 정말 큰 도움이 되어 왔어요. 그리고 현재, 작업하는 예술가로서는 제게 어떤 내부자의 시각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영
1월에 전시를 하시죠?

슈타인
맞아요. 처음에 베를린에 왔을 때, 저는 어떤 시급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공공 공간 개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 처음 왔을 때, 이곳 시민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연구를 많이 했어요.
          ZK/U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Haus der Statistik 근처 동네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주민 몇 명이 현재의 Haus der Statistik이 세워지기 전 그 장소의 역사를 아주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지요. 그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누군가가 당신들이 해온 연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어요. 그 프로젝트를 누군가에게 맡기려 했기 때문에, 저는 그게 제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어떤 지역 사회에 가서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는 거요’라는 식으로 뭔가를 무작정 내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프로젝트를 만들 수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어떤 요구나 수요를 찾는 것이고, 또 그 프로젝트가 제 능력에 맞는지 여부와 그 작업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협업하는 거지요.
          그분들이 하고 있었던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현재 Haus der Statistik 자리에 있었던 유대인 양로원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 유대인 양로원은 전쟁이 나기 8년 전인 1931년에 세워졌지요. 그리고 전쟁 직전에 유대인 공동체를 관리하는 나치의 괴뢰 조직이 그 건물을 관리했어요. 그 조직은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그 건물의 소유권을 빼앗았고, 그곳을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로 보내기 전에 나이 든 유대인들을 집결시키는 예비 수용소처럼 사용했어요. 원래 양로원이었던 곳이 첫 번째 강제 이송 활동의 일부로 사용된 것이죠. 첫 번째 강제 이송 때는 이곳에 약 160명이 살고 있었고, 그 이후에는 여러 계층의 나이 든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이송되기 전에 이곳을 거쳐 갔어요. 대략 2천 명의 사람들이 이 건물 내에서 아주 끔찍한 환경에서 살다가 죽음의 문턱으로 강제 이송되었던 거지요. 이 동네에서 연구를 하시는 분들은 이러한 역사를 꽤 많이 연구하셨고, 그 사실과 연관된 어떤 작업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어요.


Haus der Statistik WERKstatt
Haus der Statistik is a massive largely vacant complex in  the heart of Berlin, Germany currently undergoing a redevelopment planning process. ©Rico Prauss


Haus der Statistik은 주로 동독의 역사와 그 이후로 이루어진, 눈에 보이는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야기와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요. 제가 맞닥뜨린 어려움은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또 그 이야기를 현재 및 미래와 어떤 식으로 관련 지을 수 있는지예요. 그게 제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일입니다.
          제 전시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이 장소의 역사를 설명하는 큰 포스터가 공공장소에 설치될 건데, 이건 정보를 주고자 하는 교육적 목적의 시각 설치 작품이고요. 또 오디오 설치 작품도 있어요. 이 오디오는 포스터에도 포함될 예정입니다. 지금 저는 양로원에 거주하고 계셨던 분들의 이름을 읽어줄 수 있는 지역 내 자원봉사자분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그 음성을 녹음해서 전시 공간에서 무한 반복시켜 재생할 예정입니다.

지영
아, 이름을 기록한 게 남아 있나요?

슈타인
네. 나치가 매우 면밀히 기록해 뒀어요. 지역 내 자원봉사자분들이 아카이브 목록에 있는 이름을 읽을 거예요. 그 목소리를 녹음한 후에, 건물의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 오디오를 공공장소에서 계속 반복해서 재생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수개월 동안은 공공장소에서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베롤리나슈트라스Berolinastraße에 있는 Haus der Materialisierung의 바로 밖이라서 보행자들에게도 무척 잘 보여요.
          1월에 전시될 이 프로젝트는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1년 간 이 장소의 플레이스 홀더가 될 예정입니다. 이번 겨울의 이 작은 프로젝트의 목표는 완공된 건물 내에 지속적이고, 어쩌면 영구적이거나 제의적인 무언가가 설치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거예요. 이 프로젝트는 이 역사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지역 사람들을 참여시켜 이 문제에 애착과 관심을 갖게 할 겁니다. 또, Haus der Statistik의 의사결정권자들이 그 건물의 미래에 이 역사를 새겨 넣을 수 있도록 장려하는 차원도 있지요.

지영
실제 양로원 건물을 찾으셨나요?

슈타인
그 건물은 이젠 존재하지 않아요. 사진을 좀 보여드릴게요. 당신이 Haus der Statistik을 면밀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여기 보시면, 양로원은 이 거리의 18-21번지에 있었어요. 이건 1993년 지도에 1940년도 지도를 얹은 건데, 오늘날 존재하는 도시 구조물들도 겹쳐져 보이죠. 전쟁 동안에 이 지역 대부분이 폭격을 당했어요. 거의 다 무너졌죠. 이 회당 건물은 뒤편에 있는 건물 두 개 중 하나였는데, 전혀 무너지지 않았어요. 완전히 보존되었죠. 이쪽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이 Haus der Statistik이에요. 보시면, 지금 이 거리는 완전히 딴판이죠. 이 구역 전체가 전쟁 후에 종합적으로 계획되어 세워졌죠. 제 작업은 바로 여기 있고요.
          이건 전쟁이 끝나고 10년 후인 1955년에 찍힌 사진들이에요. 이게 아직도 건재한 회당이고요. 이건 회당 내부 사진이에요. 내부에 별자리 벽화도 있고, 다른 벽화도 있어요.


Map overlay
Overlay of maps of the Haus der Statistik area from 1910 and the early 90s illustrating the redevelopment of the area after World War II. ©R Stein Wexler


지영
ZK/U 웹사이트에 올려둔 사람들의 사진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슈타인
그 사진은 양로원에서 찍은 거예요. 제가 찾은 사진 중에 양로원에 거주하셨던 분들의 사진은 그게 유일해요. 그 사진에 그분들이 앉아있는 장소의 방향을 그림자의 각도에 기반해 정확히 측정해서, 현재 그 장소의 사진과 겹쳐보았어요.
Hof image overlayed on Berolinastraße
Stein edited the only remaining image of senior home residents and placed them into the contemporary urban context exactly where they were sitting in the 1930s.
©R Stein Wexler



Senior home hof
Published in 1934, this image was found in the Berlin Jewish Museum archive. To date, it is the only known photograph of Gerlachstraße 18/21 senior home residents. (Source: Ein Jahr Hilfe und Aufbau. Hrsg. vom Zentralausschuss der deutschen Juden für Hilfe und Aufbau. Berlin, 1934.)


지영
지금 당신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Haus der Statistik에서는 어떻게 전시를 하게 되었나요? ZK/U의 사람들이 도와주었나요? 아니면 스스로 장소를 찾으신 건가요?

슈타인
ZK/U에 있는 프로젝트팀과 Haus der Statistik 관리팀의 해리Harry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리고 저를 이곳 펠로우십 프로그램에 초대해 준 마티아스Matthias도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마티아스는 이곳의 사람들과 유대를 쌓고 문화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어요. 그 덕분에 할 수 있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구분할 수 있었죠. 또 아까 언급했던 이곳 동네 연구 집단의 위원회에 있는 한 여성분도 저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모두 다 제 프로젝트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고, 그분들이 없었다면 저는 이 프로젝트를 하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그분들이 프로젝트에 지원금을 주고 있어요. 그리고 제 연구 프로그램에서도 제가 이 연구와 프로젝트 개발을 하게끔 허락해 주었어요. 이분들이 이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한 분들이죠.

지영
독일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작업에 굉장히 협조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실제로 그런가요?

슈타인
미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참 복잡한 것 같아요. 이곳의 감성은 참 다르죠. 이곳은 기념물이나 추모 작업과 관련된 논의는 더 발전되어 있지만, 저작자에 관한 이슈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아요. 미국에서는 “누가 이 작품을 만들었는가?”와 같은 질문에 큰 초점을 두고 있어요. 이 질문은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거예요.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고, 따라서 피해자 집단의 일원이 아닌 작가들이 피해자의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요. 반면에 이곳 독일에서는 그게 화젯거리도 되지 않더라고요. 제가 알기로는, 비유대인 독일인 작가들이 홀로코스트 기념물과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더군요. 이건 그냥 제 생각일 수 있지만요.

지영
맞아요.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비Holocaust Memorial, 2005도 미국인 건축가피터 아이젠먼 Peter Eisenman가 설계했죠.

슈타인
맞아요. 그 분이 유대인인지는 모르겠네요. 이곳에서는 작가의 정체성이나 작가가 작품에 어떤 주장을 부여하는지에 초점을 덜 두는 것 같아요.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이 관점은 ‘유책guilt'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슈를 생각나게 하죠. 사건에 책임이 있는 집단이 그 사건을 이야기해도 되는가? 아직 저도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이 이슈는 ‘면죄absolution’와도 연관이 됩니다. 이 단어를 알고 계시나요? ‘면죄’는 종교적인 용어로, 당신이 죄를 지었다면 어떤 다른 일을 함으로써 그 죄를 상쇄할 수 있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당신이 무언가를 훔쳤을 때 기도를 열 번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죠. 이것을 면죄라고 무릅니다.
          저는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e︎︎︎’이 매우 효과적인 기념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 반기념물 운동에서 영감을 참 많이 받았어요.

지영
그렇군요. 아시겠지만, 베를린 거주자들은 매일 기념물을 많이 봐야만 하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기념물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해요. 이것을 연구하는 데 한 달은 너무 짧은 기간이어서, 사람들에게 답을 들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는 사람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 질문을 할 예정이에요.

슈타인
어떤 답을 듣게 될지 저도 궁금하네요. 당신이 한국에서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해요.

지영
저는 2년 전부터 1980년 광주에서 발생했던 5·18민중항쟁과 관련된 사적지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29곳이 5·18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최후 항쟁지로서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옛 전남도청 건물이 있는데 그 곳의 활용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5·18의 기념과 관계된 다양한 광주의 문제들에 대해 알게 될수록 세세한 부분에 중재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는 제 이해의 폭은 매우 좁고 리서치의 깊이도 부족해서 분명 오류가 있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보고 느낀 것을 간략하게 말씀드려볼게요.
          갈등의 주체들을 살펴보면, 먼저 오월 당사자 그룹이라고 불리는 유족들, 구속되었던 사람들, 부상당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죠. 언뜻보면 단체를 결성한 그들이 5·18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여요. 실제로 드러난 건 소수이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거세다보니 주요 5·18 기관들뿐만 아니라 행정기관들도 그 대표격 인사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 같습니다. 당사자들은 옛 전남도청이 1980년의 모습으로 복원되기를 바라고 있죠.
          그러나 편의상 당사자들이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예요. 당사자 그룹만 보더라도 굉장히 복잡한 이해관계들이 얽혀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당사자들이 이것을 원한다’라고 하나로 묶기는 어려울 거에요. 게다가 사실 이 사회에서 그들이 과연 얼마나 대단한 권한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죠. 각 주체들이 필연적으로 처하게 된 지금의 상황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한편, 어떤 사안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 시민들의 의견이 얼마나 수용되고 있는지 또한 미지수입니다. 사적지같은 경우, 대부분은 출입이 안되는 채로 잠겨 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하는 과정은 시민들에게 잘 보여지지 않죠. 점점 시민들은 5·18과 관련된 일들에 무관심해지고 있는데, 그 원인으로는 전투적으로 보이는 당사자들의 태도에 대한 피로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례로 당사자들은 옛 전남도청을 점거하고 오랫동안 농성을 벌이고 있죠.
          그리고 5·18의 기념은 굉장히 무겁게, 엄숙하거나 비통한 어법을 사용하며, 이루어져왔고 매해 광주의 5월은 다른 도시와 분위기가 무척 다릅니다. 제가 만약 왜 그런 방식으로 기념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깊게 추적해본다면 대한민국의 특수한 정치적인 맥락뿐만 아니라 문화적 맥락도 이해하게 될 거예요.
          최근에 저는 5·18이 발생했던 1980년 이후에 출생한 젊은 세대의 예술가, 기획자, 연구자, 활동가들이 새로운 방식의 기념의 가능성을 믿고 행동해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5·18에 접근하는 방식은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자신에게 익숙한 매체를 통해 기념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이것은 근래 5-6년 간에 걸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도한 젊은 세대들은 당사자들이나 기성세대들의 비판적인 태도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너희들이 5·18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처럼 마치 심판을 받는 것 같은 질문들을 받았다고 해요. 즉, 경험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주체의 자격, 권한에 대한 질문인거죠.
          또한, 광주비엔날레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같은, 광주의 국제적 예술 기관들은 설립 배경부터 5·18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국내외 예술가들과 기획자들과의 다양한 작업을 통해 5·18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해오고 있죠. 그러나 예술적 실천을 하는 사람들도 심판대에 올려집니다. 그들의 행위가 오히려 장소의 중요성을 훼손한다거나, 사건의 의미를 희석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죠. 몇 사례들을 통해 저는, 예술이 5·18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불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광주 내에서 5·18사적지나 기념의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에 대한 거리가 좁혀지기 어려운 여러 상황들을 보게 되면서, 여기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2020년에 특히 당사자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한쪽 편에 속하거나 고정된 역할을 가지고 활동하기 보다 매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슈타인
그 프로젝트에 대한 소식을 계속 듣고 싶네요. 한국어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쓰고 만들어낸 작품들을 보고 싶어요. 제게 책 한 권이 있는데, 가져와 볼게요. 이미 이 책*을 알고 있을 수도 있는데, 미국과 독일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에요. 이 책은 서양의 접근법에 배우 치우쳐있긴 하지만, 마지막 챕터는 당신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아요. 피해자 그룹을 대하는 과정과 관련된 이 사례 연구가 생각났어요. 그 사건은 80년대에 일어났으니, 비교적 최근의 일이죠. 그 일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 홀로코스트와 굉장히 다른 점입니다. 이 연구의 저자가 큐레이터 위원회의 이사회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 관점이 제 관심을 끌었어요. 중재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James E Young. The Stages of Memory: Reflections on Memorial Art, Loss, and the Spaces Between (Public History in Historical Perspectiv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2016


지영
고맙습니다. 당신이 광주에 온다면, 어떤 작업을 하게 될지 정말 궁금하네요.

슈타인
지영씨, 그 작업을 하게 된다면 매우 큰 영광임과 동시에 매우 힘든 프로젝트가 될 것 같군요. 한 집단의 외부자로서의 위치는 조심스러운 자리예요. 따라서, 저는 프로젝트 당사자들의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여 프로젝트 개발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아요. 대략적으로 보자면, 제 느슨한 접근법은 연구 단계, 관계 정립, 콘셉트 개발, 시범 프로젝트 실행, 콘셉트 조정, 그리고 프로젝트 완성으로 이루어져요. 해당 공동체와 깊은 관계를 갖는 데 있어서 일부러 모호하게 접근하지요. 저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어떤 특정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을 쓰면 정적인 설치 작품 보다는 계속 변하고 있는 관련 공동체의 현재 욕구를 시간에 흐름에 따라 탈바꿈시켜주는 방법론이나 의례와 같은 결과물이 나오게 됩니다. 기억, 추모, 그리고 역사는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고 발전하며, 현재의 이슈와 관점에 의해 해석되지요. 따라서, 기념 프로젝트는 그 프로젝트와 연관된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유연하게 변할 수 있어야 해요. 베를린에서 보여준 Fügung des Schicksals (Twist of Fate)에 제안한 저의 접근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드릴게요.

영상︎︎︎Fügung des Schicksals docu
A short video documenting the community engagement process of Fügung des Schicksals [Twist of Fate]


만약 메모리얼 제작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면, 저는 먼저 관계를 만들고 관련 지식을 모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광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나 연구자들의 협조나 도움을 긴밀히 받게 되겠지요. 두 번째로, 5·18 피해자 그룹 및 단체를 포함하여 추모와 관련된 관계자들과의 인터뷰와 비공식적 대화는 물론, 글이나 기록물을 통해 연구를 할 거예요.
          저는 베를린에서 수많은 기록물 저장소를 방문하고, 세 개의 지역 단체들과 관계를 맺어나가고, 그 장소에 대한 자료들을 발견한 기존 연구자들과의 업무 관계를 쌓았습니다.
          이 연구는 정보 수집과 신뢰 및 관계 구축 둘 다에 목적을 두게 될 것입니다. 연구를 통해 주제, 갈등, 그리고 여러 집단과 입장의 공통점을 확인하겠지요. 이 단계에서는 건설적인 피드백과 도움을 줄 수 있는 협력자들의 연합체를 만듭니다. 주제와 공통점이 밝혀지면, 프로젝트의 협력자들과 연합체들과 함께 긴밀하게 일하여 프로젝트 콘셉트를 개발하기 시작하겠지요.
          Fügung des Schicksals의 연구 및 관계 구축 단계에서는 양로원의 역사를 기록물로 남겨두는 요식적인 본질과 더불어 주변 거주민들이 그 역사를 추모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콘셉트의 초안이 그려지면, 저는 그 프로젝트가 공공 영역에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짧은 시범 프로젝트를 실행할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프로젝트 연합체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며, 피드백을 받아 프로젝트 실행 단계에 반영할 것입니다.
          2021년 6월에 Haus der Statistik에서 오픈하우스 행사를 열었는데, 그때 지역 주민들이 방문하여 그 장소의 역사에 대해 제가 연구했던 최초의 자료들을 보았고, 그 역사와 관련하여 제가 찾은 역사적 자료들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시범 프로젝트는 연구 과정에 지역 주민들을 참여시켰고, 기념화에 대한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습니다.

June open house
During an open house event at Haus der Statistik in June 2021, Stein invited neighborhood residents to analyze archival documents pertaining to the senior home. ©R Stein Wexler


시범과 피드백 단계가 지나면, 저는 프로젝트에 여러 제안과 비판 사항을 통합하여 마지막 콘셉트를 도출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프로젝트에 대한 관리를 연구 단계에서부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던 지역 관계자나 단체에 넘길 것입니다.
          베를린에서 지역 사람들은 나치가 작성한 ‘강제 수송자 목록’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가 그 양로원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다 같이 읽고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장소에 해당 정보를 전시하는 것으로 정해졌던 것입니다. 그 음성 기록은 교육적인 설치의 일환으로 현재 계속 재생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단계는 다음 단계와도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녹음할 당시에 저는 참가자들에게 “나이가 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쓰거나 그리게 했습니다. 이 활동은 터부시되는 주제인 ‘나이 듦’에 관심을 갖게 했고, 현대의 참가자들이 양로원 거주자들의 경험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2022년에 진행될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더 발전시킬 예정입니다.


Reading events
Over the course of three days, neighborhood residents and the general public were invited to read the names of former senior home residents. The readings were recorded, edited, and now play on loop at the site of the former home. ©Rico Prauss


제 제안이 모호하게 들릴 거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조가 미리 답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기념의 과정을 피하게 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이 구조는 프로젝트 관계자들 사이의 신뢰와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통합과 이해를 구축할 수 있는 도구를 주며, 현재의 상처를 돌볼 수 있게 해줄 미래로 안내할 것입니다.

Opening event
On January 27, 2022, also the 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 the audio-educational installation was opened during an on-site ceremony. ©Rico Pra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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